잊지 말아야 할 4월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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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따뜻함이 가득한 봄이 아닌 마음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의 달.
 

4월 3일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일' 

대한민국 남단의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섬, 
'제주도'는 지워지지 않을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비짓제주 공식홈페이지.

할머니의 바다는 온통 검은 빛

“나는 지금도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이치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우리 연옥아' 하고 두 팔 벌려 나한테 오는 것 같아나도 두 팔 벌려 바다로 들어갈 것 같다.”

-사건 생존자 김연옥 할머니-

지금은 아름다운 바다로 유명한 월정리 해변, 
그 당시에는 군 주둔지로 월정리는 죽음의 장소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북촌리는 남자가 모두 죽고 없어 '무남촌'이라고 불렸습니다.
현재 평화로운 섬으로 알려진 제주도의 모든 곳은 그들의 학살터였습니다.

사진출처-스브스뉴스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일이며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과잉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7년, 3·1절 28주년을 맞아 제주 곳곳에서는 기념 집회가 이뤄졌다. 기념 집회에서는 미국의 정치 개입 반대와 자주독립을 외치는 시위가 펼쳐졌는데, 그 당시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기마 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했고, 6명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경찰은 사과의 뜻을 비치지 않고 자신들에게 항의하는 시민들을 잡아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은 항의하는 의미에서 파업을 했으며 제주 지역 전체 중 95%에 달하는 기관 및 단체가 파업에 동참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이자 미군정은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의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보고서에 기술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로 투입하여 악행을 저질렀다.

미군정은 3·1사건이 일종의 폭동이며 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의 치안을 바로잡아야한다고 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포고문을 발표하며 일명 '초토화 작전'이 시작됐다.

그렇게 4월 3일, 미군 철수와 단독 선거 반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원했던 무장대를 포함해 죄 없는 시민들을 모두 끌고 가 고문과 총살을 하는 등 참혹한 집단 살상이 이루어졌다.

좌익과 우익 간의 정치 싸움에 의해 시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보이지만 독립 이후 미국 정부와 친일파의 정치 개입에 저항한 시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 인구의 10% 이상인 3만 명이 사망했으며 일부 해안가를 제외한 모든 마을이 붕괴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사건 이후 55년만에 첫 공식 사과를 전했다.

-참고 :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에서는 4월이면 집집마다 꼭 제사를 지내요"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역사 교과서에도 잘 실리지 않아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70년 전 4월의 제주,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일제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을 지배하려던 미국에 맞선 외침이었고,
항쟁이었습니다.

사진출처-노컷뉴스

4월 5일 '식목일'

매년 4월 5일, 나무 심기를 통하여 국민의 나무 사랑 정신을 북돋우고,
산지(山地)의 자원화를 위하여 제정된 날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식목일의 유래와 공휴일 폐지 


이날은 과거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한 날입니다. 또한 조선 성종이 세자·문무백관과 함께 농사의 모범을 보이고 풍작을 기원하는 뜻에서 직접 의식을 행하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통일 성업을 완수 하기도하고 계절적으로 청명하며, 기후가 좋아 나무 심기 좋은 시기라하여 4월 5일은 식목일이라고 제정되었습니다.

식목일은 1949년에 공휴일로 지정되었지만, 그 뒤 1960년에 식목일이 공휴일로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1961년에 식목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어 공휴일로 부활하였지만 이후 2006년부터 다시 공휴일에서 폐지되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기업과 단체에서는 여전히 기념일을 맞이해 나무 심기 행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서울숲 컨서번시

식목일 날짜 변경 검토  ?


4월 5일 식목일은 지난 1946년 정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3월 기온이 높아지면서 나무를 심는 시기가 빨라졌고, 이에 따라 식목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실제로 식목일 제정 이후 70여 년간 4월 5일의 기온은 약 2~3도 상승했다.

박종호 전 산림청장은 지난달 3일 "식목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그 타당성을 신중히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4월 5일 식목일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근거로 날짜 변경을 반대하는 의견과 현실과 기념일의 날짜가 다르다는 이유로 변경을 찬성하는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산림청은 "식목일의 역사성과 상징성 등을 고려해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식목일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유엔(UN)이 정한 '세계 산림의 날'로 3월 21일이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일'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3·1운동 정신 계승 및 민족 공동체 의식 확립 위하여 제정한 국가 기념일이다.



사진출처-국가기록원

독립을 향한 노력과 결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인 1919년 4월 11일을 말한다. 이날은 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인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밤부터 10개조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철야 심의한 후, 4월 11일 오전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ㆍ발포하고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정부는 1919년 편찬된 ‘한일관계사료집’과 1932년 ‘조선민족운동연감’ 책을 근거로 해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정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1919년 4월 11일이고 많은 자료에서 임시의정원이 이날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점을 바탕으로 기념일의 날짜 정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2018년 4월 13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부터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했다.


사진출처-국가기록원

여성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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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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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리아 (조성녀)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의 모(母) 조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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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성

"오로지 조선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아마 그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날는지 모르지마는 그는 숨이 넘는 그 마지막까지 조선을 생각할 뿐, 그가 두고 가는 친척, 자손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선생에 대한 지인의인터뷰 중. 1943, <신가정>-




사진출처-국가보훈처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념일'

올해로 7주기를 맞이한 세월호 참사, 304명의 희생자들을 기억해주세요.


사진출처-민중의 소리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이다. 특히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이 탑승해,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당시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 몇 시간에 걸쳐 언론에 생중계된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이다.

침몰 중에도 선내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이 반복됐고, 구조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의 잘못된 현장 보고, 초동대처 실패, 늦은 구조 작업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검경합동수사본부는 2014년 10월 세월호의 침몰 원인에 대해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및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 미숙 등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 경위와 이후 대처에 대한 끝없는 의혹과 논란들이 이어졌고, 잠수함 충돌설, 고의 침몰설 등 여러 가지 가설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단순한 해상교통사고로 보기엔 어려우며 정확한 진상규명과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후 2017년 3월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특별법'이 합의되면서 세월호 선조위가 출범했고, 이에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습·수색 등이 이뤄졌다.

침몰한 배 ‘세월호’는 참사 1,091일 만에 인양이 완료됐다. 그 과정에서 실종자 9명 중 4명의 유해를 수습했지만 5명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사진출처-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