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투자금융(주) 설립
1960년말부터 7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경제는 경제개발 1,2차 5개년계획으로 경제개발 기초형성과 경제자립을 위한기반을 구축하고 고도성장과 번영의 70년대를 맞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1973년, 세계 유류파동으로 세계 경제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그에 따른 자원난과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등의 사태로 인해 한국 경제는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10월 유신과 8.3조치 기업공개 등의 커다란 정책변화가 일어나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 모든 국민들이 안정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와 같은 여파로 기업은 계속적인 자금부족과 압박으로 인하여 사금융에 의해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재무구조는 만성적인 취약 상태에 있었다. 이에 사금융을 제도금융으로 유도하고 유휴자금의 산업화를 꾀하여 상공업체의 금융비용 절감과 자본시장 개방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부산 상공인들의 여망이었다.
때를 같이 하여 1972년 8월 17일, 정부에서는 거액의 사채자금을 흡수, 매개하여 기업의 단기자금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은행 예금이자 소득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거액 유휴자금의 보유자에게는 새로운 금융저축 수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단기금융회사의 설립을 유도할 것을 목적으로 단기금융업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부산상의에서도 단자회사의 설립에 관계되는 제반문제에 대해 1972년 4월 7일부터 28일까지 제조업계 250개 업체와 상업, 서비스업, 경제단체 등 비제조업체 150개 업체에 대해 기초 자료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 금융기관의 다양화 및 전문화에 대한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 금융기관의 다양화 및 전문화에 대한 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 금융기관의 대출업무에 수반되는 담보물 평가문제와 복잡한 수속 절차상의 애로 등의 문제점들이 노정됨으로써 이용상의 편익이 예견되는 단자회사의 설립이 크게 필요하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강석진 부산상의회장은 1972년 2월 25일 동명목재상사 회의실에서 개최된 제81회 부산상의 의원 총회에서 부산상공회의소가 모체가 되어 부산지방 단기금융회사의 설립을 조속한 시일내에 추진키로 합의하고 곧 실천단계에 옮겼다.
이날 부산상의의원들이 구상한 설립 방법으로는 첫째, 회사의 성격은 단기금융업으로 하는 주식회사로 하고, 둘째, 회사의 자본금은 납입 자본금 5억으로 하며, 셋째, 회사의 업무는 어음관련 업무와 유가증권업무 등으로 한다고 결의하였다.
단기금융업법의 제정을 계기로 단자회사 설립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 오던 부산상공업계는 1973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설립계획을 제시하였다. 그 당시 설립추진작업을 벌여오던 서울투자금융주식회사가 1973년 내인가를 얻어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동년 1월 30일 설립등기를 마치고 우리나라 두 번째 단기금융회사로 탄생하였다.
강석진 회장이 주축이 된 부산상공업계는 당사의 설립을 서둘게 되었고, 단기 금융회사업무를 연구해 오던 부산은행이 동년 2월 3일 부산투자금융 주식회사 발기인으로 가입 결정됨과 동시에 기촉제가 되어 2월 28일, 부산은행장실에서 발기인단을 구성하고 공식모임을 갖기로 했다. 강석진 회장을 비롯하여 부산상의 부산은행 임원 및 다수의 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회를 개최하고 발기인단을 3월 13일까지 결성키로 하면서 설립에 관한 실무는 부산은행에 위임하였다.
부산은행을 발기인 대표로 위촉하고, 당사 설립시에 발행하는 주식의 수는 10만주(10억원)로 하되 이중 발기인은 5만주(5억원)만을 인수하고 잔여주식 5만주에 대하여는 주식청약서를 작성하여 일반공모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그후 부산은행은 정관 초안 작성에 착수하였고 1973년 3월, 발기인을 대표하여 재무부 장관에게 단기금융업 내인가를 신청하여 3월 8일에 재무부로부터 인가를 얻는 등 준비작업과 함께 1973년 3월 13일 부산은행장실에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확정된 법인 1개사와 11명의 부산투자금융주식회사 설립 발기인은 다음과 같다.
- (주)부산은행(발기인 대표)
- 강석진(동명목재상사 회장)
- 서재식(부산은행 대표이사)
- 박정관(한흥석유주식회사 대표이사)
- 왕상은(협성해운주식회사 대표이사)
- 강기수(동명목재상사 부사장)
- 안범수(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 박장길(부산은행 전무이사)
- 박태주(부산은행 상무이사)
- 김응종(부산은행 상임감사)
- 이동설(미성건설(주)대표이사)
발기인 취지서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리에 완수하고 제3차 5개년 계획의 제2차 년도를 맞이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내자동원문제가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했던 바, 이에 내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신용질서를 확립할 목적으로 1972년 8월 17일자 법률 제 2339호로 공포된 단기금융업법은 우리 지방 상공인에게 매우 고무적이며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갖게 했던 것이다.
당사의 설립 목적은 민간 금융시장 및 자본시장의 육성을 지원하고 이와 관련된 업무를 행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에 있었다. 이와 같은 요지는 당시의 지방 금융제도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결함을 시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중소기업의 가장 큰 애로인 자금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하나의 대책으로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부산지방에서는 아직껏 단기금융업법의 목적에 상응한 단기금융회사가 설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중 사채의 제도금융에로의 전환에 상당한 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부산의 상공인들은 부산은행 및 부산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부산투자금융주식회사(가칭)를 설립하여 단기금융회사로서의 사명과 책임 완수에 전력을 경주하고자 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석진 회장은 1973년 2월 28일 발기인 임시회의에서 일반공모에 의한 인수주와 발기인 인수주의 비율을 반반으로 하여 자본과 경영을 분리시켜 경영의 합리화와 기업의 공익성을 실현하는 데 그 의의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직 단기금융회사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일반대중의 주식투자에 대한 의욕이 매우 낮고 아직 단기금융회사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고, 1973년 국회의원 선거가 겹쳐 자금사정이 여의치 못한점, 그리고 수년간 지속된 불황으로 각 기업체의 재무구조가 악화된 요인 등으로 인해 실제 단자회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투자의욕이 매우 주저되던 때였다.
그 후 수차에 걸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후 73년 3월 13일 발기인 총회에서는 당초의 취지와는 다소 상이하더라도 주식을 안정성있게 재분배함이 내외 여건상 부득이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행주식 총수 10만주 가운데 2만주만 일반공모를 하고 발기인이 8만주를 인수하기로 함으로써 당시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 당사 발기인대표 명의로 게재하고 4월 6일 1일간 부산은행 본점 영업부에서 주식청약 신청을 받았다. 그러나 당사 설립을 위한 일반 주식공모는 예상과는 달리 청약자가 쇄도하여 임시 발기인 회의를 비상소집하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다.
일반주식공모자가 많았던 사실은 그 당시 동명목재의 지역사회에 비친 재무구조와 강석진 회장이 직접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있으면서 상공회의소가 주축이 된 부산은행의 신뢰도, 부산 재계의 유력인사들이 당사 발기에 임한 관계로 일반투자자의 신뢰도가 높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일반주식공모의 성화에 힘입어 임시 발기인 비상회의에서는 일반대중다수의 출자자를 위한 운영방법을 채택한다는 당초의 취지를 살려 발기인은 총 발행 주식의 절반에 해당하는 5만주만을 인수하기로 양보한 후 5월 4일 총 발행주식 납입 자본금 10억원은 부산은행 본점에 전액 납입 완료되었다.
1973년 5월 19일 오전 10시, 창립총회를 부산시 중구 동광동 1가 1번지 부산은행 강당(부산 데파트 4층)에서 개최하고, 제1호 의안에서 창립사항을 보고하고, 제2호 의안으로 정관 승인을 원안대로 통과하였으며, 제3호 의안은 임원선임, 제4호 의안은 이사, 감사의 조사보고, 제5호 의안은 임원 보수 결정의 건을 처리하고 11시 50분에 폐회되었다.
1973년 5월 24일 당사 설립등기는 본점의 주소를 부산시 중구 부평동 1가 1번지의 1에 두고 등기 목적은 어음 및 채무증서의 발행과 어음의 할인과 매매, 어음의 인수와 보증, 어음 매매의 중개, 앞 각호의 부대되는 업무로서 재무장관의 승인을 얻은 업무로 확정짓고 발행주식 총수 10만주(보통주식)와 이사, 감사는 초대임원 전원의 이름으로 등기를 마쳤다.
부산투자 부지 선정에 있어서도 시내 여러 장소를 물색하고 구입하는 데 고충이 많았다. 미래가 내다보이는 부산상권이 형성하는 위치와 많은 시민이 이용하기 편리한 장소 등을 감안하여 서면 구 북성극장 자리가 좋겠다고 결정하였으나 그 당시 그 땅을 필요로 하는 매입자는 이미 여러 사람이 있었다.
지주 강 모씨와 김 모씨에게 강기수(동명목재상사 부사장), 현상대씨는 며칠 동안 다니면서 여러 차례 상의한 결과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때부터 강석진 회장은 부산지역 경제 총수로서 지역 상공발전에 관심을 가지면서 회사의 중요정책에 관여하였을 뿐 모든 것을 그 당시 동명목재 강기수 부사장(현 동명문화학원 이사)에게 일임하고 대외활동을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회사는 1973년 5월 29일 부산시 중구 동광동 1가 1번지로 본점을 이전하여, 1973년 6월 15일 9시 부산데파트 4층에서 상임임원 3명, 직원 9명과 각계 인사와 발기인, 많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개업식을 가졌다.
이날 김종석 대표이사는 개업식사를 통하여 "사금융을 제도금융화시킴으로써 지역내 각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고 나아가 지역 상공업의 보다 원활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창립된 당사의 개업에 임하여 그동안 비상한 관심을 보여 준 시민 여러분께 감사드림과 아울러 임직원 일동은 일치단결하여 단기금융업무를 통한 지역사회개발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이날 남덕우 재무부장관은 대독된 치사를 통하여 사금융의 양성화와 신용질서의 확립을 향한 진일보로서 단기금융회사 가운데 지방 최초의 발족을 보게 된 당사 창립을 진심으로 경하하면서 앞으로 무궁한 발전과 아울러 지방산업 및 지역사회개발에 초석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어 개업식이 끝난 상오 10시부터 업무가 개시되었다. 이로써 1972년 2월 25일 부산상공회의소 정기 의원총회에서 강석진 회장이 회사 설립을 위한 발의가 있은 후, 실로 15개월 21일만의 산고 끝에 감격스런 개업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세 번째, 지방에서는 최초의 개업이었다.
강석진 회장은 부산투자금융(주)를 설립함에 있어 동명목재 설계실에서 본인이 직접 설계하여 미성건설에 의뢰하여 건축했지만 본인이 이용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고 다만 부산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