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호우

▲정난숙 초빙교수(학생상담센터)
▲정난숙 초빙교수(학생상담센터)

극한 호우라는 낯선 말이 금방 친해졌다. 그저께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점점 더 많은 비가 내리며, 이 비를 묘사하기 위해 더 극적인 말이 동원된다. 억수로 내리던 비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붓다가 폭포수처럼 퍼붓게 되었다.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버린 그런 느낌이 드는 말이다. 하늘에서 폭포수가 내리는데 도리가 없다는 마음이 든다. 극한 호우다.

살다 보면 무엇을 더 할 수 없을 것 같은 극한의 경지를 만날 때가 있다. 대학 4학년 시월 연휴에, 두 명의 친구와 지리산을 올랐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무모하지만, 그때는 지도 한 장에 의지해서 세 여자가 호기롭게 나섰다. 옛날이라 텐트는 물론이고, 밥 지어 먹을 코펠과 버너, 연료인 석유, 알코올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낑낑거리며 갔다. 운이 좋아서 2일간 천왕봉을 거쳐 세석까지 무사히 산행을 마쳤고, 셋째 날, 세석산장에서 3시간만 내려가면 버스를 탈 수 있는 거림코스로 하산을 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으로 라면 3개만 남기고 쌀, 김치, 연료들을 모두 사람들에게 주고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다. 3시간 정도 걸으면 큰 길이 나와야 하는데 점점 더 깊은 숲길과 계곡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3km 걸으면 되는 길을 놓치고 16km가량의 산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가을이어서 낮도 짧았다. 길은 아직 첩첩산중인데 점점 어두워지고, 다리는 붓고 배는 고프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천운으로 청학골로 접어들었고, 그때만 하더라도 청학골에는 차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컴컴한 밤에 산길을 더 걸어서 하동으로 내려왔다. 정말 극한 상황이었다. 늦은 밤 하동에 도착해서 마을 어귀에 텐트를 치고 자려고 했었는데 이장님께서 집으로 부르셔서 따뜻한 밥을 차려주시고 뜨끈한 방도 공짜로 제공해 주셨다. 동네 이름도 잊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따뜻한 손길을 내어주신 그분들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함께 그 극한의 여행을 했던 친구들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극한 호우가 끝나려면 괴롭고 힘든 과정이 길게 이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나갈 것이다. 결국에는 극한 호우도 끝나고 이 더운 여름도 지나면서 가을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인 장석주는 ‘대추 한 알’이란 시에서 말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붉게 익히는 것 일게다.

이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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